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르샤바 봉기 (문단 편집) === 종지부 === >'''이 [[바르샤바|도시]]는 지구에서 사라져야 한다. 단지 [[독일 국방군|국방군]]을 위한 열차역만 남기고 나머지는 돌 한조각 남기지 마라! [[초토화|모든 건물은 기초까지 없애라]]!!''' >-SS 친위대 지휘관 회의에서 [[하인리히 힘러]]가 한 발언 >'''바르샤바는 평온해져야 한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니|지구상에서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 [[아돌프 히틀러]] 결국 바르샤바의 봉기는 우세한 화력과 기갑 전력을 보유한 독일군에 의해 진압당하기 시작했다. 9월 24일 모코투프가 공격당해 27일 점령되었고, 29일에는 졸리보시가 공격당해 다음날 함락되었다. 진압군 사령관 에리히 폰 뎀 바흐는 항복하면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여 포로 대우를 해 줄 것이라는 선전방송을 하였다.[* 힘러는 바르샤바 봉기군을 포로로 잡지 말고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지만, 폰 뎀 바흐가 무시해버렸다. 하지만 이 자는 자신이 내건 협정 조건을 모두 내다버린 후 바르샤바 내의 건물들을 모조리 파괴하도록 명령하고, 항복한 6만여 명의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한 볼라 학살의 주범이다. 바르샤바에서뿐만 아니라 폰 뎀 바흐는 [[폴란드 침공]] 후 폴란드인들을 추방하고 재산을 약탈하여 현지에 독일인들을 정착시키는 임무를 맡았고, 친위대 장교로 파르티잔과 민간인들을 가리지 않고 도살했으며(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원균|민간인 희생자를 파르티잔 희생자 수에 편입시켰다]]'''), 1943년 7월에는 [[라트비아]] [[리가]]에서 3만 5천, [[벨라루스]], 폴란드 동부에서 20만 이상의 민간인들을 학살한 [[괴물]]이다.] 봉기군은 각 지역으로 분산되어 와해되었다. 10월 2일, 오후 8시를 기하여 바르샤바 모든 지역에서 [[전투]]가 중지되었다. 10월 4일, 바르샤바 공과대학 뒤의 광장에서 국내군에 소속된 대대들이 도열해 있었다. 이윽고 광장에서는 폴란드 국가인 '돔브로프스키의 [[마주르카]]'가 울려퍼졌고, 그걸로 봉기는 끝났다. 같은 날에 봉기군 [[신문]]과 [[라디오]] 방송도 중단되었다. 살아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위조신분증을 배부받아 살아남았다. 독일군은 특수공병대대를 바르샤바 시내에 투입, 바르샤바 전역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동유럽]]의 [[파리(프랑스)|파리]]'''라는 명성을 듣던 바르샤바는 무참히 파괴당했다. 아직 살아남은 봉기군 중 일부는 [[항복]]을 거부하고 도시 곳곳에서 계속 절망적인 항전을 하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German_Brennkommando-firing_Warsaw_1944.jpg|width=500]] 화염방사기로 바르샤바를 초토화시키는 독일군. 봉기 진압 후 히틀러는 이 도시를 완전히 파괴해 없애버릴 것을 명했다. 히틀러는 1939년 6월 20일 전쟁 전에 이미 뷔르츠부르크의 독일 건설부를 방문해 바르샤바를 조직적으로 파괴하고 독일식으로 재건할 팝스트 계획(Pabst Plan)을 세워두었는데 전황이 기울어 도시를 독일식으로 재건할 수 없자 히틀러는 이 도시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기로 했다. 먼저 나치는 65만명의 바르샤바 시민들을 프루슈코프(Pruszków)의 난민 수용소로 보내버렸다.[* 이들 중 약 5만 5천명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고 그 중 1만 3천명은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시민들을 추방한 뒤 나치는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이미 절반 가까이 파괴되어 있던 바르샤바의 남은 건물들을 모조리 폭파했다. 폴란드의 상징이자 얼굴인 왕궁도 벽 한장 남지 않고 폭파되어 가루가 되었다. 1944년 8월 1일부터 10월 2일까지 있었던 2달간의 대혈전은 결국 비극적인 종말을 맞았다. 봉기 기간 동안 바르샤바의 25%가 파괴되었고, 봉기 진압 후 독일군의 조직적인 파괴 때문에 35%가 더 파괴되었다. 1939년의 공습, 1943년 게토 철거, 그리고 바르샤바 봉기로 인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도시의 85%가 완파되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볼라 지구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바르샤바 중심부의 신세계 거리(Nowy Swiat)의 경우 71채의 건물 중 65채가 파괴되었다. 인명피해 또한 엄청나서 봉기 기간 동안 1만 6천명의 봉기군 전사자를 포함해 최대 추산 20만명의 시민들이 학살당했다. 1945년 1월 7일, 소련군은 바르샤바를 '''"해방"'''시켰다. 이 실패는 영국의 폴란드 망명 정부에게 치명타가 되었다. 폴란드는 결국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고 망명 정부는 사실상 생명이 끝나 버렸다. 다만, 망명 정부 자체는 영국에서 계속 존속했다. 공식적으로 해체한 것은 1990년 폴란드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레흐 바웬사]]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로 이때 바웬사에게 헌법 전문과 폴란드 정부의 상징물 등을 증여했다. [[구글 어스]]로 1945년 바르샤바의 처참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1935년 사진과 비교해볼 때 건물들 대부분이 지붕이 사라져 있고, 다리들이 끊어져 있다. [[파일:1945 warsaw wola google earth.jpg|width=900]] 1945년 바르샤바 볼라 지역 중 일부.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이 위치한 곳 주변부. [[https://www.youtube.com/watch?v=ca6sBaNsluo#s-x.x|영상]] 1945년 바르샤바의 모습을 재현한 영상도 있다. 전쟁의 처참함이 무엇인지 보여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